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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의 귀주대첩 간단정리

by 멋집니다 2023. 12. 19.

 

>>김훈 최질의 난 2분 요약<<

강감찬 

-아버지가 태조 왕건이랑 고려를 만든 개국공신(금수저)

 

-원래 붓으로 정치하던 문관

 

-현종이 왕이 되기 전에는 역사책에 기록한줄 없는 무명 정치인

 

-현종이 왕이 되면서 역사책에 등장함(사랑받았음)

 

-감찰어사(암행어사)가 강감찬 잘라야 한다고 했는데 감찰어사가 잘려버림;

 

-처음 한 전쟁이 거란 3차 침공

 

-은퇴할 때 현종이 개성(북한)에 석탑을 세우며 공을 기림

 

귀주대첩 

 

-제 3차 거란전쟁이 진행중이던 1019년 2월 1일, 강감찬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물리침

 

-30년 동안 이어진 고려-거란 전쟁의 마지막 전투 (1차 ~ 3차)

 

-두 나라 모두 마지막 전투라는 각오로 모든 걸 걸고 싸움

 

-망치와 모루 전술은 그때 당시 성공하기 정말 힘들었음

 

-지도, 시계가 없어서 길잃어버리는 군대가 많았기 때문

 

-강감찬의 활약으로 거란 장군 대부분 사망, 거란군 거의 전멸

 

-너무 기뻤던  왕(현종)이 선물들고 강감찬한테 달려옴 

 

-24년 1월 22일에 수정했습니다.

 

 

 

강감찬은 고려시대의 문관으로 예부시랑, 한림학사를 거쳐 평장사를 지내었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으로 고려에 큰 위기가 찾아왔으나 강감찬이 활약한 귀주대첩에서 거란족을 물리치며 고려를 구해낸 영웅이었다. 강감찬이 죽었을 때 고려의 덕종은 3일 동안 국장을 치르며 영웅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었다.

 

생애

 강감찬은 948년 삼한벽상공신 강궁진의 아들로 현재 서울 낙성대 인근인 금주에서 태어났다. 이후 성종3년, 서기 983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부시랑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한다. 1010년 요나라가 고려를 침입하였을 때 다른 신하들의 항복 주장과는 반대로 일시적 후퇴를 한 후 전쟁을 이어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경력이 있다. 이런 경력 때문인지 이듬해인 1011년 강감찬은 군사 지휘권을 행사하는 요직을 맡았는데 이는 요나라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인사로 추측된다. 현종과 강감찬의 추측대로 1018년 요나라는 소배압 장군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략하기 시작했는데, 거란족이 말한 침략의 이유는 고려의 현종이 거나라로 입조 하지 않은 것과 강동 6주를 돌려주지 않은 것을 이유로 삼았다. 이때의 강감찬은 상원수가 되어 원수 강민첨과 함께 20만 8천의 병사로 거란을 상대하게 된다. 이 전쟁에서 강감찬은 역사책에 등장하는 대로 귀주 지역의 강물을 막았다가 요나라 군대가 그 지역을 지날 때 막아두었던 둑을 터트려 강둑을 이용해 요나라 군을 물리치게 된다. 한 번의 전투로 큰 타격을 입은 요나라군은 요나라로 돌아가기 시작했지만 고려군은 귀주에서 오히려 적을 크게 섬멸하게 되어 이 전투가 귀주대첩으로 전해진다. 10만 명 수준의 침략군이었던 요나라군 중 살아 돌아간 요나라병사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다고 하니 강감찬의 활약이 어느 정도였을지 상상이 된다. 놀라운 활약을 펼친 강감찬의 활약은 당연히 현종에게까지 알려졌고 현종은  친히 영파역까지 강감찬을 마중 나와 금화팔지와 오색비단을 하사하며 연회를 벌였다고 한다. 이 전투로 인해 요나라를 비롯한 대륙의 국가들은 고려를 침략하는 것을 꺼리기 시작했고 이때 고려와 요나라의 국경이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귀주대첩

 1919년 3월 10일 고려군이 요나라군을 상대로 귀주 지역에서 활약한 전투이다. 고려군은 20만 이상, 요나라군은 10만 이상의 군세로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의 군사적 충돌이었다. 고려는 건국때부터 거란과는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거란과는 대립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반면 거나라의 가장 큰 경쟁자였던 송나라와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송나라와의 국경지역에 힘을 집중하려는 거란은 힘을 집중하기 위해서는 고려를 먼저 없애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배경으로 거란은 3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하였는데 그중 마지막 침략이 강감찬이 활약한 귀주대첩이다. 10만 규모의 3차 침략군을 이끌던 것은 소배압이었는데 소배압은 전쟁 토기 압록강, 삼교천 지역에서 고려군에게 패배하였지만 후퇴가 아니라 우회를 선택해 개경으로 계속 남하하였다. 이후 지속된 전투에서 소배압은 지속적으로 패배하였지만 결국 개경에서 겨우 100리 떨어진 신은현까지 도착한 기록이 남아있다. 신은현까지 도착한 소배압은 막상 소배압에 도착한 뒤 거란으로 후퇴를 결심한 듯 말머리를 북으로 돌려 다시 거란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후퇴하는 과정에서도 금교역, 연주 등에서 고려군에게 패하며 가장 큰 사망자를 낸 귀주에 도착한다. 이 귀주를 지키고 있던 게 바로 강감찬으로 강감찬은 김종현, 강민첩의 기병과 연합하여 거란군에게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게 되는데 이 귀주에서 거란의 명문으로 소문난 교련장, 상온, 아과달, 객성사, 작고, 고쳔명, 해리 등 수많은 거란의 중요 장수들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때 거란은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을 입었고 북으로 돌아간 후 다시는 침략하지 않게 된다. 강감찬의 그늘에 가려져 있지만 이때 고려의 원수였던 강민첨 대장군의 활약도 뛰어났고 강민첨 대장군의 초상은 현재 대한민국 제588호로 지정되어 국립 중앙 박물관이 소장 중이다. 

 

 천년전 삼국시대의 수많은 위인들은 현재 대한민국의 밑거름이 되어주었는데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한반도를 수호하고 우리만의 언어와 문화를 만들어 내며 아름다운 한반도를 후세에 물려주었다. 그중에서도 강감찬은 가장 중요한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며 한반도를 지켜낸 구국의 영웅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