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전성기를 이끈 강감찬.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용맹한 장수로 고구려의 을지문덕, 조선의 이순신과 함께 조선의 3대 명장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한반도의 역사는 물론 더 나아가서는 거란을 막아내며 동아시아 전체에 그 영향을 주었다고도 할 수 있는 구국영웅에 대해 알아보겠다.
대기만성형 생애
강감찬의 선조는 고구려 말기의 장군으로 진주 강 씨이며, 아버지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개국에 일조한 강궁진이었다. 강궁진이 고려 개국 당시 경주 지역에서 금천으로 이동하며 경주 지역에서 강감찬을 만들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여러 설화에서 강감찬의 어머니가 여우라는 기록이 있다는 점, 강감찬이 태어날 때 하늘에서 문곡성이 내려왔다는 설화가 있다. 그리고 현재는 그가 태어난 생가가 낙성대라는 이름으로 보호되고 있다.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열전에 의하면 젊은 시절 학문을 좋아하고 남들보다 총명하여 기발한 생각을 많이 해냈다고 한다. 하지만 강감찬의 장원으로 급제할 때의 나이가 36세로 늦은 나이에 관직을 시작하였고 이후 26년 동안 단 한 번도 고려사에 등장하지 않으며 거란이 아니었다면 역사책에 이름 한 줄 올리지 못할 뻔하였다. 하지만 현종이 즉위한 뒤로 빠르게 출세하였는데 1010년 현종 때 요나라의 고려 침공 때, 조정의 모든 문관들이 항복을 주장하였지만 홀로 맞설 것을 주장하는 기개를 보여준다. 이때 처음으로 역사서에 이름을 올린 강감찬은 이러한 열정을 인정받아 중추사, 이부상서, 동북면행영병마사로 점차 높은 직책을 받으며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기 시작한다. 이후내사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를 겸하며 굉장히 늦은 나이에 실력을 발휘한 대기만성형 인물로 볼 수 있다.
10년간의 놀라운 활약
이때까지 실질적인 전쟁 경험이 없던 강감찬은 거란 방어 작전을 진두지휘 하였는데 이때 고려 무관들은 청야전술과 유격 전술, 귀주대첩까지 성공해내며 철저한 작전과 작전의 실행으로 거란군을 거의 완벽하게 격퇴하였다. 이후 거란의 3차 침공까지 막아낸 강감찬은 1020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기록이 남아있고 이를 두고 토사구팽이라는 의견과 74세의 노령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의견으로 나뉜다. 1년 뒤 개경의 흥국사에 석탑을 세워 아래와 같은 글귀를 남겼다고 한다. '강감찬은 삼가 받들어 우리나라가 영원히 태평하며 먼 곳과 가까운 곳이 항상 평안토록 하기 위해 공손히 이 탑을 조성하여 영원토록 공양하고자 한다.' 이후 낙도교거집, 구선집 등의 책을 집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안타깝게도 현재는 그 책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키도 작고 풍채도 볼품없어 평소에는 사람들이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나라의 중대사를 의논할 때에는 정색하고 대사에 임해 나라의 주춧돌이 되니 감히 범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고 거란의 침입을 격파한 후 나라에 풍년이 이어졌는데 이때에도 백성들은 '이게 다 강감찬 공 덕분이다'라고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강감찬은 앞서 언급한 대로 고려시대의 평균 수명을 뛰어넘는 60에 가까운 나이까지 고려사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60이 넘는 나이에 고려의 역사에 자연스레 등장해 겨우 10여 년 동안 거란의 3차 침입까지 막아내고 개성에 나성을 건축하는 등 많은 활약을 펼쳤다. 그 뒤에는 문하시중의 관직을 받았는데 이는 개국공신을 제외하면 고려시대 최고의 작위였다.
진실과 거짓이 얽힌 탄생과 사망
강감찬의 탄생과 사망에 대해서는 많은 설들이 있는데 의외로 강감찬의 무덤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로 추정된다. 이 묘는 발견된 때가 1963년이어서 비교적 최근이며 금천 강씨에서 조선 인조 때 민회빈 강 씨와 관련된 사건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강빈의 아버지인 강석기가 강감찬의 17대 손으로 강빈 역시 강감찬의 후손이었는데 그녀는 시아버지인 인조로 인해 생을 마감해야 했고, 그 형제들도 모조리 사라지거나 유배를 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강석기의 친척들은 화를 모면하기 위해 성을 바꾸었고, 조상의 묘에 성묘도 하지 못하면서 강감찬의 묘까지 실전되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주장일 뿐 실제 근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또 다른 금천 강 씨 문중에서도 이 묘가 강감찬의 묘가 맞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발언을 하여 확실하지가 않다. 특히 이 주장을 믿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순종 때 기록된 '승정원일기'에 강감찬의 묘를 보수하고 제사를 지내라는 명을 내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기록에는 '실전된 묘를 찾아 지방관이 방문하고 시설을 정비하여 제사 지내라. 강감찬의 묘 관리에 신경을 쓰라'는 기록이 있다. 순종은 일본 제국이 조선을 식민지배하기 직전의 왕으로 이때까지도 강감찬의 묘를 나라에서 관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사실은 강감찬의 후손이 나라가 두려워 묘를 찾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고 해석된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며 묘의 위치가 소실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불과 몇십 년 만에 묘를 잃어버린 게 되기 때문에 굉장히 실망스러운 사실이며 강감찬의 후손을 주장하는 이들이 구한말의 혼란한 시기 강 씨 문중으로 편입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때문에 이 묘는 강감찬의 묘가 맞는지 확실하지 않으며 문화재로 지정 보류 상태이다. 지석이 너무 상실되어 판독이 어렵고 분묘와 석물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