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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안중근

by 멋집니다 2023. 12. 17.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항일 의병장 이자 정치 사상가인 안중근.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으며 말기에는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 힘썼다. 1909년 만주의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뒤, 교수형으로 사망했다. 
 

생애

 안중근의 집안은 고려 시대 후기의 유학자 안향의 자손으로 안중근이 태어났을 당시 4백석의 토지를 가지고 있는 해주의 대지주였다. 갑신정변으로 집안에 잠시 위기가 찾아왔지만 어린 시절의 안중근은 서당에서 학문을 닦으며 통감 9권을 배웠으며 공부에는 뜻이 없어 사냥을 좋아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사냥을 다니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자연스레 배웠고 다른 사냥꾼들을 따라 사냥을 다니며 총을 배워 명사수로 지역에서 유명세를 떨쳤다. 그러던 중 아버지 안태훈은 동학 농민 운동군을 토벌하여 승리를 거두는 등 군으로부터 눈길을 받았고 이후 산포군을 조직해 농민군 진압작전을 펼치는 등 토벌에 참가하였다. 이 시기 안중근 역시 동학군으로 토벌에 참가하여 기습작전 등을 이끌며 활약했다. 1903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년 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며 안중근은 대한제국을 위한 길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는 집안의 전 재산을 들여 삼흥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시작하였고 그 뒤 황해남도에 남포돈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활동을 통한 독립을 꿈꾸었다. 교육에 힘을 쏟던 안중근은 한계를 느끼고 1907년 연해주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에 가담하며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안중근은 한 사람의 의병으로서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직접 지휘할 수 있는 의병부대를 원했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계동청년회의 임시사찰에 선출되어 의병 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일화 중 하나는 독립군의 소속으로 전투를 치르던 중 일본군 포로를 사로잡게 되었는데 안중근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일본군 포로를 죽여야 한다는 소리를 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안중근은 국제공법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며 포로를 풀어주었고, 이 포로를 풀어주고 얼마 뒤 일본군에게 공격당해 기습공격을 받아 패배했다. 이후 신임을 잃은 그는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운동을 멈추지 않았으며 1909년 초, 같은 뜻을 가진 동지 11명과 함께 왼쪽 약지 한 마디를 끊으며 동의단지회를 결성하였다. 안중근의 이 일화는 영화로도 제작될 정도로 유명하다. 
 독립 운동을 이어가던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회담을 위해 러시아로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였고, 즉각적으로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10월 26일 오전 9시 계획대로 하얼빈 역에 도착하였고 러시아군의 사열을 받기 위해 기차 밖으로 나왔다. 안중근은 때를 기다려 기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반자동권총으로 사격하여 명중시키며, 자신의 꿈을 이루게 된다. 명중 직후 안중근은 에스페란토어로 '코레아 우라!'라고 크게 세 번 외쳤다고 하는데 이 뜻은 대한독립 만세라는 뜻이었다. 안중근은 러시아군에게 바로 체포되었고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으로 넘겨진다. 안중근은 감옥에 갇혀 러시아와 일본을 오가며 재판을 받았고 1910년 2월 14일 일본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이후 3월 26일 일본군에 의해 처형되었는데 오늘날까지도 유해를 찾지 못했다. 재판 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에 대한 질문이 있었고 안중근은 15가지 이유를 말하였는데
1.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한국을 식민지배한 죄
3. 정이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4.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5. 군대를 해산시킨 죄
6. 사람들을 학살한 죄
7.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8.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9. 한국인들이 신문을 만들지 못하게 한 죄
10. 제일은행의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ㄷ죄
11. 한국에게 300만 파운드의 빚을 안긴 죄
12.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13.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14. 일본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을 죽인 죄
15.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대한제국 곳곳에서는 안중근을 구하기 위한 변호 모금 운동이 일어나고 많은 변호사들이 변호를 자원했으나 일본군은 일본인 변호사를 선임하였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후 3월 26일 처형되기까지 42일 동안 안중근은 많은 유묵을 남겼고, 이 유묵들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1962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 되었다. 
 

사상

 처형직전 옥에서 쓴 동양 평화론에는 안중근의 생각이 드러나있다. 안중근은 '만약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지면, 찰가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 황인종에게 욕을당할 수는 없다````.'라고 저술하였다. 옥중 집필한 동양 평화론에서 하얼빈 의거를 동양 평화를 위한 전쟁으로 표현하고 하였는데 동양 평화란 한. 중. 일 3국이 각자 독립을 유지하며 상호 노력하여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에 대응하는 체계를 만들 수 있다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이런 내용을 볼 때 안중근은 한. 중. 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며 서로 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통해 동양을 점령하고자 하는 서양세력을 막을 수 있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의 논리와 함정을 이미 알아보고 이에 대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 특히 동양 평화론의 내용에는 한. 중. 일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뤼순을 발전시킨 뒤 세 나라에서 대표를 파견하고 평화회의를 조직하고 3국 청년으로 구성된 군단의 편성, 이 군단의 청년들에게는 2개국 이상의 언어를 배우고 하게, 은행을 설립하여 공용 화폐를 만들자는 주장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안응칠 역사'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집필하였는데 원본은 남아있지 않으며 일본어 번역본과 한문 등사본이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