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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통일의 기초를 닦은, 이사부

by 멋집니다 2024. 1. 1.

이사부는 우산국을 신라의 땅으로 만든 장수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이사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업적으로 이제 막 커가던 신라의 성장을 상징하는 장수이다. 이사부는 굉장히 총명하여 권력을 잡고 자신이 원하는 뜻을 펼칠 줄 알았다.

 

신라 정치의 중심, 이사부 

 이사부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열전에서 이사부를 설명하고 그의 생애를 간단하게 적어두었다. 내물왕의 4 세손으로 신라에서 활약을 펼친 장수이다. 변경의 관리가 되어 가야국을 함락하고, 우산국을 병합하였다. 고구려의 도살성과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으며 우산국 병합은 사실 지중왕 13년에 도살성과 금현성의 함락은 진흥왕 11년에 각각 기록되어 있다. 살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진흥왕이 이찬이사부에게 명하여 가야국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십오 세였던 사다함은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나섰다. 왕은 처음에 거절하였으나 그의 요청이 간절하여 허락하였으며 그를 귀당비장으로 임명하였다. 이런 사실로 볼 때 이사부는 지중왕과 진흥왕을 거치는 동안 성장하는 신라의 다양한 전쟁에서 선봉장의 역할을 맡았다. 신라가 지증왕에 이르러 나라의 틀을 잡는데 이사부가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550년 백제는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고,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을 빼앗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 상황에서 진흥왕은 두 나라 군사가 지친 틈을 이용하려 하였고, 곧 이사부에게 그 두 성을 모두 빼앗으라 명한다. 이사부는 두 성을 빼앗고 지켜내는 데 성공하며 두 성을 신라의 성으로 만든다. 512년 이사부는 아슬라주의 군주가 되어 우산국을 병합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사람들이 우산국의 사람들은 사나워 힘으로 항복받기 어려우니 꾀를 쓰는 게 좋다 하였고 이에 나무로 사자를 많이 만들어 항복하지 않으면 섬에 사자들을 풀어놓겠다고 협박했고, 이 협박이 통해 우산국 사람들이 항복하였다고 한다. 

 

지소태후의 남편

 이사부의 아버지는 아진공이고 어머니는 보옥공주였다. 이사부의 가족 중 이보다 더 중요한 인물은 부인인 지소태후이다.  지소는 원래 이름이 식도부인이며 법흥왕의 딸이었는데 처음 입종에게 시집을 가서 진흥왕을 낳았다. 아마도 입종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이사부와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이사부와 결혼하여 아들 세종을 낳았다. 6세 풍월주였던 세종은 미실과 결혼하였고 세종과 미실의 결혼을 추진한 지소와 이사부 사이에 나눈 대화가 남아있다. '미실로서 의논하여 며느리를 얻는 데 지아비에게 의논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하니 태종이 폐하의 집안일을 감히 제가 말씀드리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태후가 이 처녀는 곧 영신의 손이니 나의 우군으로 영실은 나에게 잘못이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좋지 않게 결정하였으나 어려움이 있어 묻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태종이 영실은 충신이다. 유명을 소홀히 할 수 없으니 너무 ㅏ무라서는 안 된다. 이사부가 이미 좋아한다면 황후 사도를 위로할 수 있으니 좋지 않겠는가 하여 태후가 크게 기뻐하면서 사랑하는 지아비의 가르침이 없었다는 큰 잘못을 저지를 뻔하였다. 이에 미실로 하여금 궁에 오게 하였다. 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때 왕은 진흥왕이었는데 진흥을 낳은 지소부인은 태후가 되었고 영실의 후손인 미실을 며느리로 들인 것이 이사부와 의논하는 대목이다. 지아비로서 태종을 존경하는 말투였는데 영실을 생각하면 고운 시선으로 미실을 볼 수 없었다. 태종은 사정을 들어본 뒤 냉정하고 침착하게 판단하여 권하였다. 그러자 태후는 그의 조언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정중했다.  아버지의 명으로 재혼한 영실과는 좋지 않은 사이였지만 그 이후의 남편인 이사부에게는 깍듯했다. 

 

신라의 대영웅

 이사부의 복잡한 혈연관계는 왕실과 얽혀있다. 이사부와 지소태후 사이에 낳은 딸은 숙명공주였다. 숙명은 태후 못지않게 많은 문제가 있는 인물이었다. 이화랑은 위공의 아들로서 황하, 숙명, 송하 공주가 모두 공을 따라 배웠다. 공은 이에 숙명궁주와 정을 통하였는데 그 때 태후는 아이의 총애를 홀로 받기 위해 모든 일을 공주에게 받들게 하였다, 왕은 어머니가 같은 누이라 하여 특별히 사랑하지는 않았다. 공주 또한 그러했고 공주의 아버지는 태종공인데 상상으로서 나라를 위해 일하는 가장 중요한 신하 중 하나었다. 그래서 왕은 공주를 소홀히 대할 수 없었고 공주는 스스로 자만하여 방탕했다. 나중에 숙명은 이화랑과 결혼하여 보리와 원광을 출생하였고 원광은 신라 불교를 반석에 올리며 불교의 승려로 대성한다. 보리는 12세에 풍월주가 되었는데 이로 생각해 본다면 이사부는 원광의 외할아버지이다. 그런 숙명이 자기 아버지인 이사부를 얼마나 존경했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한 번은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 태종 각간은 곧 너의 할아버지이다. 하늘이 높지 않고 땅도 넓지 않다는 대영웅이시다. 너는 마땅히 그분을 신처럼 생각해야 한다.' 이사부는 영웅을 넘어 신으로 불릴 정도였는데 물론 딸이었던 숙명이 아버지를 그 이상으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신라 권력의 중심 이사부

 이사부와 그의 부인 지소 그리고 딸 숙명 사이에 이루어진 삼각편대는 권력의 기본이었다. 부인의 사랑은 지극정성이었으며 딸의 존경또한 대단했다. 부인은 전남편의 아들인 진흥왕을 손에 쥐고 있었고 숙명이 부간인 왕에게서 아들을 낳은 다음 당대의 풍월주와 결혼하였다. 어머니와 딸의 행보가 매우 비슷한 모습이다. 그 중심점의 이사부는 상대등 또는 각간으로 아들인 세종은 진흥왕에게서 아우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고 6대 풍월주가 되기에 이른다. 진흥왕이 실권 행사를 하기 전 신라 왕실은 이사부 중심으로 움직였다는 증거가 곳곳에 남아 있다. '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삼아 중앙과 지방의 군대 일을 조직하도록 하였다'라는 대목이 증거로 제시된다. 우리가 앞서 가진 의문 하나가 여기서 풀리는데 지중왕 대까지만 해도 이사부는 외직으로만 돌고 있었다. 몇몇 공적으로 역사에 이름을 올렸지만 법흥왕이 재위하는 26년간은 별다른 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그러다 왕의 딸 지소와 결혼하였고 이사부는 중앙 정치의 핵심 인물로 등장한다. 이는 우연히 벌어진 일이라기보다 권력 다툼에서 승리한 결과로 보인다. 그 해 7월, 이사부는 제2위인 이찬의 지위에 등극했는데 왕에게 말하기를 국사는 임금과 신하의 잘못을 기록하여 만대에 보이는 것입니다. 국사를 편찬하지 않으면 후대는 무엇을 보고 배우겠습니까? 하자 왕은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일을 진행했다. 지금 전해지지 않는 국사가 바로 그 책이다. 이사부는 먼 옛날 권력이 무엇이고 어떻게 권력을 손에 쥘 수 있는지 알았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