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에서 항상 1위를 기록하는 세종대왕이 장영실에 대해 남긴 글이 있다.
"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함 솜씨뿐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보다 훨씬 뛰어나서, 매일 강무 할 때 나의 곁에 두고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찌 이것을 공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제 자격궁루를 만들었는데 비록 나의 지시를 받아서였지만, 만약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결코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동래현의 노비
조선시대 최고의 과학자로 기억되는 장영실. 한국역사의 과학자 가운데 장영실만큼 이름이 자주 거론되는 인물도 없다. 장영실은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 자격루를 한국 최초로 만든 인물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자주 등장할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그의 삶은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정확한 출생 배경이나 과정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장영실은 동래현의 관노, 즉 노비였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장영실의 부친은 원나라 사람으로 모친은 기녀였다고 한다. 세종실록 : 행사직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래 원나라의 소주사람이고 어미는 기녀였는데 공교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 사람을 아낀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 장영실이 관노가 된 것은 모친의 신분 때문이었는데 조선시대 관기들은 천민에 해당되었다. 관기가 딸을 낳으면 어머니를 따라 관기가 되었으며 아들은 관노가 되었다. 장영실이 태종과 세종대에 살았던 인물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관노였던 탓에 정확한 출생시기와 나이를 가늠할 수가 없다. 다만 장영실의 부친이 원나라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고려 때 송나라에서 망명한 이후 한반도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귀화인인 셈이다. 요즘으로 친다면 다문화 가정 출신이었고, 머리가 매우 총명한 사람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뛰어난 재주
장영실은 세종 이전의 태종 시절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아 궁중기술자로 일하였다. 제련,농기구,무기 제조, 수리에 뛰어났으며 1421년 윤사웅, 최천구와 함께 중국으로 유학하여 각종 천문기구를 익히고 돌아왔다. 이후 세종의 총애를 받아 정 5품 상의원 별좌가 되며 관노의 신분을 벗고 궁정기술자로 활약하게 된다. 조선시대 노비가 관직을 받는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는데 장영실이 상의원 별좌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어려운 일이 많았다. 장영실에게 별좌라는 관직을 주려 했던 세종은 이 문제를 이조판서였던 허조와 병조판서였던 조말생과 논했다. 허조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임할 수 없다. 하였고 조말생은 가능하다 하였다. 두 대신 간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자 세종은 다른 대신들과도 이 문제를 상의하였는데 유정현의 강한 동의에 힘입어 장영실을 상의원 별좌로 임명했다. 상의원은 왕의 의복과 궁중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별좌는 종 5품의 무록관, 즉 월급이 없는 직책이었다. 이후 장영실이 자격루 제작에 성공하자 세종은 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정 4품 벼슬인 호군의 관직을 내리고자 하였다. 이때도 많은 신하들이 반대하였으나 황희가 '김인이라는 자가 평양의 관노였으나 날래고 용맹하여 태종께서 호군을 특별히 제수하신 적이 있으니, 유독 장영실만 안 된다고 할 수 없다.'라고 하여 세종은 장영실에게 호군을 내린다.
기계가 없던 시절에는 해를 통해 해시계를 보고시간을 어림짐작으로 측정하였고 밤에는 별자리의 움직임을 통해 시간을 확인하였다. 이 방법은 생각보다 정확했으나 날씨에 흐리면 시간을 알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장영실이 만들어낸 것이 물시계이다. 물을 넣은 항아리 한 귀에 작은 구멍을 뚫어 물방울이 하나씩 떨어지는 것을 다른 항아리에서 받아 그 부피를 재면 시간에 따라 그 부피가 늘어나는 것이 원리인데, 하루동안 흘러들어간 물의 깊이를 재서 12 등분하여 한 시진의 길이를 계산하였다. 중국에서는 기우 너 전 7세기에 발명되었다고 전해지며 주각, 또는 경 루라고 불렸다. 그러나 매일매일 물을 갈아주어야 하는 불편함과 항상 관리하는 사람이 필요하였는데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고 시간을 잘못 측정할 경우 큰 소동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가만히 놔두어도 계속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물시계는 송나라의 과학자 소송의 손에서 탄생했다. 1091년 소송은 물레바퀴로 돌아가는 거대한 물시계를 발명하였는데, 그 장치들이 너무나 복잡하고 정교하여 소송이 죽어 사라진 뒤, 재현하지 못해 함께 사라졌다. 12세기에는 아라비에서 쇠로 만든 공이 굴러 떨어지며 시간을 알리는 자동 물시계가 개발되었다. 세종 또한 이러한 물시계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이 물시계를 궁궐의 잘 보이는 곳에 설치하고자 하였으나 이 구상을 실현으로 옮길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때마침 장영실이 등장하여 재주를 보였으니, 이 둘은 합심하여 물시계를 만들게 된다. 세종은 왕이기 이전 뛰어난 언어학자, 과학자로 알려져 있었는데 세종과 장영실은 정인지, 정초 등이 조사하고 수집한 자료와 문헌을 가지고 자격루라는 새로운 자동 물시계를 만들어냈다. 장영실은 자격루를 완성한 뒤 곧바로 혼천의와 자격루를 결합하여 새로운 천문기구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 두 가지를 결합하면 절기에 따라 태양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고 농촌에서 해야 하는 일의 시기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었다. 천지인이 하나로 연결되는 왕도정치가 실현되는 것이었다. 자격루가 완성된 지 4년 후 1438년 장영실은 또 하나의 물시계인 옥루를 완성하였고 세종은 흠경각을 지어 그 안에 설치하도록 하였다.
사라진 장영실
세종과 함께 자격루를 만들어낸 훌륭한 과학자인 장영실은 신분에 의한 한계인지 본인 스스로 남긴 기록이 전무하다. 게다가 1442년 갑자기 모든 기록이 사라지며 어디로 향했는지, 죽었는지에 대해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장영실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안여가 부서진 사건 때문으로 기록된다. 대호군 장영실은 안여 만드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튼튼하지 못해 부서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1442년 음력 3월 안여가 부서졌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여기서 나오는 안여는 왕이 타는 가마였는데 조선시대의 왕은 걷지 않았다. 왕뿐 아니라 높은 신문들은 걷지 않고 가마를 탔는데 황의 행렬에서 가마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 시대의 왕이 움직인다는 것은 국가가 움직이는 것이었는데 그런 중요한 안여가 부서진 것이다. 전시 상황도 아니었고, 조선시대 최대 과학자인 장영실이 새로 만든 안여가 부서지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1442년 장영실은 임금이 타는 안여를 만드는 일에 제작 감독으로 참여한다. 흥미로운 것은 안여라는 용어가 유일하게 세종실록에만 등장한다는 점인데, 이 때문에 안여에 대한 정확한 모양은 알기 힘들다. 안여는 장영실이 발명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기존의 가마에 바퀴를 달아 편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편안할 '안'여가 된 것으로 추측된다. 세종이 이천을 다녀오는 길에 날이 안 좋아 길이 험해졌고 험한 길에서 안여가 부서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세종은 백성 5백 명을 동원해 부서진 안여를 수리하여 이용하려고 하였다. 장영실에 대한 기록이 사라진 것에 대해 수많은 의견이 있지만 모두 추측일 뿐이고 아무것도 밝혀진 사실은 없다. 계급 중심의 조선사회에서 동래현의 관노에서 정 3품 벼슬에 오르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장영실의 업적은 간의대, 대간의, 소간의 , 일성정시의, 앙부일구, 규표, 천평일구, 정남일구, 현주일구, 갑인자 등 다 적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런 많은 활약을 펼친 장영실이 안여가 부서졌다는 이유만으로 사라졌다는 것은 불편한 부분이 있다. 동래현 관노로 알려진 그는 어디서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 그의 일생에 대한 실마리는 최근에 풀렸는데 세종 때 훌륭한 천문학자인 김담이 장영실의 매형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동래현의 관노였지만 매형의 영향으로 천문학에 대한 기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과학자가 역사에서 갑자기 사라진 것은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는 물론 장영실에 매력을 느끼는 현대인들의 마음에도 허전함을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