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은 1545년 태어나 1598년 사망할 때까지 조선의 바다를 수호한 명장으로 정읍현감, 진도군수,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인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고 임진왜란 동안 옥포, 노량, 당포, 당항포에서 승리했다. 이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조정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죄로 잡혀갔지만 정유재란에 원균이 대패하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조선의 수군을 재건하였다.
생애
이순신은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의 12대손이다. 5대 조인 이변은 영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증조부는 병조참의에 이를 정도로 두각을 나타낸 집안이지만 이순신의 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집안이 기울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순신이 무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역할이 큰 것으로 전해진다.
어린 시절 서울 건천동에서 생활하였는데 이 때 같은 마을에 유성룡이 살았고 유성룡은 이순신에 대한 기록을 징비록에 남긴다. 이 징비록에는 어린 시절부터 이순신이 남달랐음을 적어두었는데 '이순신은 어린 시절에도 남에게 구속받지 않으려 하였고 다른 아이들과 모여 나무화살을 만들어 전쟁놀이를 하였으며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그 사람의 눈을 쏘았다. 자라면서 말을 잘 타고 활쏘기를 즐겼으며 글을 잘 썼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1576년 30이 넘는 나이에 처음으로 병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한다. 이후 사복시주부, 조산보만호, 녹도둔전사 등을 거쳤지만 억울하게 백의종군을 당하기도 하였고 유성룡의 추천을 받아 고사리첨사, 절충장군, 만포첨사,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이 자리에 오른 이순신은 군량의 확보를 위해 해도에 둔전을 설치하였다.
임진왜란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는데 이 날을 공휴일로 집에서 쉬는 중이었다. 쉬던 도중 왜선 350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하고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고 동시에 경상좌수영, 경상좌수사 등은 싸우지도 않고 도망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후 이순신은 옥포대전으로 불리는 첫 해전을 벌였고 왜선 26척을 침몰시키며 큰 승리를 거두게 된다. 옥포대전을 시작으로 이순신은 수백척이 넘는 왜선을 침몰시키며 활약을 이어갔고 그중 한산도대첩이 가장 유명하다. 1년 동안 연전연승을 이어간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하지만 이순신의 승승장구를 질투한 다른 장군들과 왜구의 모함으로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되고 도원수 권율의 밑에서 생애 두 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된다. 백의종군을 위해 남해안으로 향하던 이순신은 길 위에서 어머니의 부고를 받았지만, 길 위에서 잠시 성복을 한 뒤 다시 남쪽으로 향하였다. 이후 원균을 비롯한 다른 장군들의 연패로 조선의 수군은 궤멸 직전의 위기를 맞고,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다시 불러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이때 선조가 내린 교서가 남아있는데 그 내용은 '지난번 경의 관직을 빼앗고 죄를 준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 잘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오늘 패전의 욕을 보게 된 것이니 무어라 말할 수 있겠소.'라며 핑계를 대는 부분이 있다. 이순신이 통제사로 돌아왔을 때 남아있는 해군은 군사 120명에 병선 12척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이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맞서 명량해전을 벌였으며 왜선 31척을 부수는 믿을 수 없는 승리를 달성하게 된다. 알려지지 않은 사실로는 이순신은 제해권을 되찾은 뒤 고금도로 진영을 옮긴 후에 오갈 곳 없는 백성들을 불러 모아 둔전을 경작시켰으며 어염을 판매함으로써 스스로 군비를 마련하였다. 이때 모여든 난민들이 수만에 이른다고 한다. 임진왜란의 패배를 즉감 한 왜구들은 1598년 뇌각하기 위해 노량에 500척의 왜선을 모으게 된다. 이순신은 이 퇴각하는 왜선을 공격하여 많은 왜구를 죽이고 왜선을 침몰시키며 전쟁의 마지막까지 활약한다. 그러나 선두에서 지휘를 하던 중 총에 맞고 쓰러지게 되었는데 죽어가는 중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사기가 떨어지니 내가 죽는 것을 비밀로 하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사후
이순신의 전사에 대해서는 수많은 의문이 뒤따른다.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는데 왜 무리해서 왜선의 한복판까지 들어갔는지, 일부러 죽은 것은 아닌지에 대해 많은 의문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후세의 추측, 의견일 뿐 정확하게 기록된 것은 없다. 왜구로부터 조선을 지켜낸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이순신은 난중일기, 시조 등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고 특히 시조들은 우국충정이 담긴 걸작으로 뽑힌다. 이순신의 사망 소식을 접한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우의정으로 임한다. 이후 공신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좌의정, 영의정이 더해졌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 동아일보에서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보수하였고, 박정희 대통령 때 현충사의 경력을 확대, 성역화하고 전시관을 설치하여 난중일기와 이순신의 다른 유품 등을 전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