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대표하는 실학자로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하였다. 남인 가문에서 태어나 이익의 학문을 접하며 개혁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정조의 재위기간에는 조정에서 일하며 과학자로서의 뛰어남도 보여주었다. 이 시기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유배생활까지도 경험한다. 이 유배 기간 동안 사회의 피폐함을 직접 경험하고 고뇌함으로써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기고 개혁안을 발전시키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큰 업적을 남긴다.
생애
1762년 태어난 정약용은 부친의 임지에 따라 화순, 예천 및 진주를 돌아다녔고 부친으로부터 경사를 배우며 과거시험을 준비하였다. 후에 큰 영향을 미친 이익의 학문을 16세 때 접하게 된다. 이때 때마침 부친의 임지가 평양이었는데, 이때 이가환과 이승훈 등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것을 알게 되었다. 정약용이 훗날 근기학파의 실학적 이론을 완성하는데 기초가 되는 중요한 시기로 평가된다. 이후 1783년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서울의 성균관에서 공부하며 학문의 깊이를 더해갔는데 대학, 중용 등의 경전을 집중적으로 연결하였다. 1789년에는 식년문과 갑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을 시작한다. 이후 10년 동안 정조의 관심 속에서 예문관검열을 시작으로 형조참의까지 두루 역임하였는데 이 시기에 한강에 배다리를 준공시키고 수원성을 설계하며 기술 과학자로서의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시기 또한 이때였는데 단순히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고 천주교에 대한 공부를 한 것인지, 신자로서 천주교에 믿음을 가진 것인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이 땡스 ㅣ천주교는 성리학적 가치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어 기존 권력층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었는데 정약용의 신앙 공부가 문제로 제기된다. 수차례에 걸쳐 천주교 신자가 아님을 주장하던 정약용은 1801년 천주교의 교난 때 유배를 당하게 된다. 17년에 걸친 유배 생활을 끝낸 정약용은 향리로 귀환하게 된다. 유배기간 동안 좌절하지 않고 학문에 배진한 정약용의 학문은 더욱 깊어졌고 이후 실학적 학문을 완성시키는 기회로 활용하게 된다. 17년 동안의 유배라고 하면 큰 충격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오히려 정약용은 이 시기를 자신의 학문을 완성시키는 소중한 시간으로 사용한다. 오히려 배움을 받기 위한 문도들이 찾아오며 연구와 저술에만 전념했고 성리학적 사상을 극복해 보려고 하였다. 500여 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는 대부분이 이 유배기간 동안 만들어졌다. 한양으로 돌아온 이후 사망할 때까지 그는 향리에 은거하며 다양한 저술작업을 이어나가며 학문에 매진했다. 정약용의 생애는 결코 쉽지 않았지만 그는 조선왕조를 개혁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으며 선진유학을 비로소 해 다른 사상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유교과정에서 불교와 접촉했고 유배 이후에도 서학에 대한 연구를 이어갔는데 이는 정약용의 탐구정신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업적
그는 당시 조선왕조의 위기를 해소하고 왕도정치가 실현될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가 만들어지기를 희망하며 개혁사상을 이어갔다. 그때 당시의 학문은 수준이 높지 않았는데 그는 '여유당전서'를 통해 학문의 부족함을 파악하고 개선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국왕이나 관료가 공식적인 기구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그의 정치사상은 왕도정치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노력이었으며 주로 기존의 집권층이 가지고 있는 정치관을 개선하기 위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의 가치관은 위로는 국왕부터 아래로는 양민까지 이어지는 민본 의식을 실천하고자 함이었다. 19세기의 조선의 정치는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로 바뀌어가고 있었고 이에 따라 국가기강이 문란해지고 관료체제가 부패하였으며 백성들의 삶이 점점 힘들어지는 시대였다. 이런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그는 관료기구의 개혁안을 마련하는데 집중하였던 것이다. 우선, 육조에 소속된 아문들을 새로이 배치하고, 승정원과 왕실 관련 아문들을 모두 이조에 예속시키는 작업을 하였다. 군도 하나의 시설에 소속시켜 명령전달체계를 일원화하였다.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된 관료기구의 효율을 위해 의정부의 기능을 강화시켰고, 이를 위해 비변사를 개편하고 중추부를 변무만을 담당하는 조직으로 개편한다. 또한 왕과 관료집단 간의 사적인 연결을 방지하기 위해 청요직의 폐지를 주장하였는데, 왕을 정점으로 하고 의정불르 통해 권력이 정직하게 행사되도록 하기를 원했으며 육조를 중심으로 관료체제를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새로운 관료제를 위해서는 새로운 관료가 필요하다고 말하였고, 이를 위해 과거제 또한 개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장원에 급제하고도 관직을 얻지 못하는 일이었었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급제자의 수를 줄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과거제의 실시 절차를 정비하였으며 고시과목도 다양하게 늘렸다. 경학과 관련된 과목들이 불규칙적으로 출제되게 하였으며 우리 역사는 물론 관료의 실무 행정과 관련되는 잡학, 체력의 단련을 요하는 시사를 새롭게 추가하였다. 이로써 다양한 기준으로 관료를 선발하고 관료의 기본적인 자질과 실무 능력을 고양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정약용은 왕도정치론의 차원에서 사회개혁론을 제기하였는데 그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 민에게 항산을 보장해 주고 상공을 보호할 것을 제시했다. 또한 보민에 힘쓰고 궁민의 구제 또한 중요하게 생각했다. 조선 후기의 다른 실학자들은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정전제의 정신을 이어받아 토지개혁을 이루고 인정의 회복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의의
정약용의 사상은 당시 사회가 가지고 있던 다양한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탁월한 사상이었다. 이런 그의 사상은 오늘날 학계에서도 실학사상의 대가이자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개혁사상가로 생각하게 만든다. 그는 유배 생활을 통해 당시 사회가 가지고 있던 다양한 문제점들을 직접 경험하며 사회개혁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토대로 현실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그 문제점들을 스스로 고쳐나갔다. 그의 이러한 노력들은 정조와 같은 성군에게 감명을 주어 관직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하였으며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서는 창의적이고 강직한 신하의 보필이 필요하고, 스스로 이와 같은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훈련하였던 듯하다. 그는 정조 아래에서 자신의 자신이 직접 개혁 정사를 실천하기도 하였다. 비록 생의 대부분은 정치와 떨어져 유배된 상태에서 보내게 되었지만 당시 사회의 피폐함을 직접 파악하고 참신한 개혁안들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개혁의 목표와 개혁이 완료된 사회에 대해서는 뚜렷함을 가지고 있지만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이나 과정에 대해서는 별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의 개혁안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 잘 드러나지만 이와 함께 실천하는 데 있어 제한적인 모습까지도 드러나게 된다.
민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는 평가를 받지만 18세기를 전후하여 조선의 개혁 의지를 강하게 피력하고 그 의지를 책으로 저술한 역사적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의 업적을 보면 자신의 부를 쌓기 위한 노력보다는 빈곤과 착취에 고통받는 백성들에 대한 마음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그 시대의 문제점을 밝히고 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인물이었다. 왕도정치가 이 땅에서 이뤄지도록 노력했으며 그 목표를 위한 한 인간의 생을 바쳐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