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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대표하는 친일파, 이완용

by 멋집니다 2023. 12. 25.

이완용은 일제 강점기 시절을 대표하는 매국노이다. 일제의 편에서 을사조약을 적극적으로 고종의 퇴위를 주도한, 한반도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이완용에 대한 글을 쓰기로 결심한 것은 그의 독특한 이력 때문인데, 이완용의 양부였던 이호준은 흥선대원군의 친구이자 조선의 조정에서 중요한 핵심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양자인 이완용이 친일 행위를 하였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또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친일파이지만 일본어를 단 한마디도 할 줄 몰랐으며 조선을 대표하는 친일파답게 굉장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굉장히 검소한 식습관을 유지했다고 한다. 조선의 궁중 식사문화는 왕부터 상다리 휘어지는 식사를 시작하여 윗사람이 먹다 남은 음식을 아랫사람이 먹는 문화였는데 이완용의 점심은 대부분 간단한 샌드위치였다고 한다. 

 

 조용했던 성장 과정

 가난한 양반가문에서 태어난 이완용은 1867년 32촌 관계에 있는 중추부 판사 이호준에게 입양되었다. 이호준은 당시 조선 최대의 정치인 중 한 명으로 이조참의, 동부승지이자 흥선대원군의 친구였으며 사위 조성하역 시 흥선 대원군의 측근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서자인 이윤용 또한 대원군의 서녀와 혼인을 하여 왕실과 깊은 연을 맺고 있었다. 이완용이 입양되던 1867년은 병인양요를 비롯해 조선이 크게 흔들리며 불안정한 시기였고 이완용의 어린 시절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양부 이호준이 조선 정치의 거물이었던 만큼 다른 정치인들의 자제들과 비교를 당하기 십상이었고 양어머니와 배다른 형제들의 기에 눌려 굉장히 조용하게 자랐다고 한다. 이에 이호준은 "어떤 일에 대해 마음속으로 분명하게 알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 너무 적어 마땅히 설명해야 할 것도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남자로서 대단히 좋지 않은 습관이니 고쳐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882년 25세의 나이로 장원에 급제한 후, 주서가 됐다. 당시 엘리트 정치인이 거쳐가던 규장각 대교를 겸직했으며 그 후 홍문관 수찬, 의정부 검상 등의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아나간다. 이후 해방영군사마의 자리에 있었는데 이는, 이호준과 이완용 부자가 흥선대원군을 완전히 버리고 민 씨 정권과 결탁한 상태임을 다시금 확인시켜 준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조선의 이런 혼란한 상황을 몸으로 겪으며 의를 지키다 망하는 것보다는 정치구도를 빠르게 파악하고 이익이 되는 쪽으로 움직이는 게 더 낫다는 경험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정치인으로서의 성공

 당시의 이완용은 민씨 정권으로부터 적대감이 없으면서도 신문물을 이해하는 젊은 엘리트로서 고종의 눈에 들었다. 과거 급제부터 정 3품 당상관에 오르기까지 5년도 채 걸리지 않았는데 이는 조선 역사에서도 가장 빠른 승진 속도였다. 이후 시간이 흘러 고종의 퇴위를 주도하는 인물이 되는 것을 보면 정치적 성공이라는 야망을 위해 의리나 충성심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의 신임을 얻은 이완용은 1887년 미국 워싱턴의 대사관에 일하며 영어를 배워나갔다. 1890년 귀국한 이완용은 형조참판, 공조참판, 동지의금부사, 동지성균관사 등 수많은 관직을 요직 하며 대한제국의 핵심 인물로서 대미협상을 맡아 주도했다. 이완용은 조선의 중심에서 당시 조선의 큰 사건들을 모두 경험하였는데, 대한제국의 곡창 지대에서 벌어진 동학농민운동과 대규모 농민 봉기로 시작된 조선이 뒤집히는 모습까지도 보게 된다.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고종은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했고 청나라는 이에 응해 조선으로 군대를 보내게 된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일본과 맺은 텐진 조약이 자동으로 파기되며 일본군도 덩달아 조선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때부터 대한제국의 본격적인 몰락이 시작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한반도 땅 위에서 경쟁하듯 농민군을 죽여나가기 시작했고, 더 이상 죽일 농민군이 없어지자 당연하다는 듯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일본의 승리로 끝나며 이완용이 몸담고 있던 수구파 정권이 붕괴되었다. 이후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으로 조정에서의 생활을 이어갔으며 시모노세키 조약, 갑오개혁, 명성황후 시해, 일본의 삼국간섭, 요동반도에서의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 개화파의 몰락, 을미사변, 을미개혁 등 불과 1,2년 사이에 수많은 사건이 일어나며 조선은 극도로 불안한 상황을 보였고 이완용은 이 모든 사건을 직접 경험하게 된다. 

 

이완용의 기록

 이완용의 일기를 보면 진심으로 조선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과 조선 백성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하여 노력하는데 일본의 세력이 아시아에서 제일 강함으로 차라리 일본과 문화적,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조선이 하나로 힘을 모은다면 일본은 더 큰 제국을 건설하고, 자연스레 조선인의 삶도 나아질 거라는 내용이 있다. 이 글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매국을 함으로써 나와 내 주변 사람들, 이 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진다는 확신이 있다면 나는 매국을 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완용은 흥선대원군파로 정치 생활을 시작했지만 그가 힘을 잃자 자연스럽게 고종의 수구파에 몸을 담았으며 고종이 힘을 잃자 민 씨 세력에 몸을 담았다. 이후 독립협회에도 가담해 독립협회 제2대 위원장으로까지 활동했고, 러시아의 편에 서서 러시아와 싸웠으며, 시간이 지나자 일본에 가담해 일본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모습을 보면 이완용은 한 인간으로서 높은 수준의 성장보다는 정치적인 성공인 인생의 1목 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