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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화랑 김유신의 생애

by 멋집니다 2023. 12. 22.

김유신은 천년의 신라 역사에서 신하로서 왕으로 추존된 유일한 인물이다. 신라의 삼국 통일을 주도하였으며 다섯 명의 신라 왕을 섬겨 그 당시 신라에 핵심 인물이었다. 순충장렬흥무대왕으로 추존되었으며 신라를 대표하는 무력집단인 화랑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이후 신라뿐만 아니라 고려, 조선을 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추앙받고 있다. 

 

 생애

 김유신은 금관국을 세운 수로왕의 12대손이다. 금관국의 구형왕은 세 명의 아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하였는데, 이 때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구형왕과 그 아들들은 신라에서 장군, 대량주도독으로 활약하였고 그러던 중 김유신이 태어나게 된다. 많은 진골귀족의 아들 중 한명일뿐이었던 김유신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나 15살이 되던 해인 609년 화랑이 되며 역사책에 등장한다. 김유신은 신라의 군에서 생활하던 중 629년 그의 나이 35세 때 고구려와의 낭비성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고구려군에 크게 패한 신라군의 사기가 꺾이고 싸우기 힘든 지경이 되었는데 김유신이 홀로 고구려진영으로 뛰어들어 적군 장수의 목을 베어 왔다고 한다. 바로 이 전투의 지휘관이 훗날 김유신과 함께 삼국을 통일하는 김춘추의 아버지인 김용춘이었는데 김유신의 활약을 눈여겨본 김용춘의 제의로 정치적 동맹, 혈연동맹을 맺으며 서로 굳건한 관계가 된다.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는 김춘추의 아이를 임신해 혼인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김춘추를 집으로 초대한 김유신이 누이동생 문희와 김춘추가 가까워지도록 노력하였고 결국 문희가 김춘추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실이 왕에게까지 알려져 김춘추와 문희는 혼인을 하며 혼인을 통한 혈연관계까지 완성이 된다. 이후 이들의 관계를 가까워지게 만드는 사건이 있었는데 김춘추의 딸이 백제의 공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딸의 복수를 원한 김춘추는 고구려의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고구려로 향했는데 이때 오히려 고구려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유신이 1만의 결사대를 이끌고 고구려로 향하게 되었고, 고구려는 김춘추를 풀어주게 된다. 

 

업적

 이후의 김유신은 진골 귀족으로서는 최대 관등인 소판으로 승진하였다. 하지만 김춘추를 비롯한 왕족들과의 강한 신뢰관계를 유지하던 김유신은 이후 상장군으로 진급하였고 백제의 가혜성, 성열성, 동화성 등의 성을 점령하고 계백이 이끄는 백제군을 격파하는 활약을 펼친다. 647년에는 상대등 비담, 염종이 일으킨 반란에서 비담을 죽이고 9족을 모두 죽이며 반란을 제압한다.  당시 백제와 신라 사이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김유신은 번번이 백제를 제압하고 성을 빼앗아오며 공을 쌓아 올렸다. 당시 백제에 있어 김유신은 악몽과도 같았는데 김유신이 참여하는 전쟁마다 수만 명의 백제군과 장군들이 죽어나가고 성을 빼앗겼다. 김유신이 없는 다른 곳에서 백제군이 신라의 땅을 빼앗으면 김유신이 찾아와 더 많은 백제 땅을 빼앗아버렸다. 이런 활약 속에서 김유신은 상주행군 대총관으로 또다시 승진하고, 진덕여왕의 총애를 받는다. 전장에서의 활약에 따라 신라 내에서 김유신의 정치적 입지도 더욱 강해졌는데 진덕여왕이 서거한 뒤 신라는 귀족 회의인 화백의 추대로 '알천'이 왕이 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김유신은 무려 귀족 회의인 화백의 결정을 취소시키고 자신의 사위였던 춘추를 왕으로 추대하고 왕으로 만들어버리는 권력을 보여준다. 이듬해 김유신은 한 단계 더 작위가 올라 대각 간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무열왕(김춘추)의 셋째 딸이던 지소와 혼인한다. 김유신은 신라 왕족들과의 이중, 삼중 혼인을 통해 명실상부한 신라 최고 권력자로 부상하며 상대등으로 승진한다. 

 

삼국통일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당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는데 마침내 660년 당 고종이 소정방, 유백영이 지휘하는 13만 대군으로 신라를 지원한다. 당나라와 신라의 지원군은 그 해에 바로 백제를 멸망시키고 백제의 수도인 사비를 점령한다. 백제를 점령한 당.신라 연합군의 삼국 통일은 손쉬워 보였으나 백제의 멸망 이후 고구려와 말갈이 연합하고 백제의 귀족들이 백제 흥복 군을 만들어 합세하여 당과 신라 연합군을 거칠게 몰아붙였다. 이후 수년에 걸쳐 두 연합군 간의 밀고 당기는 전투가 계속되었지만, 김유신은 항상 승리하며 승기를 신라연합군 쪽으로 가져오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러한 김유신의 활약에 당에서도 봉상정경, 평양군개국공이라는 당의 관직을 내렸고 맏아들인 김삼광이 당 고종의 요청으로 좌무위익부중랑장으로 고종을 숙위 하기도 하였다. 김유신에 대한 신라 왕족의 신뢰는 엄청났는데 김유신이 병으로 667년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지 못하자 문무왕은 김유신에게 내정을 맡기고 직접 원정을 나가기도 하였다. 삼국시대에 왜 나라와 삼국 간의 교류가 활발했다는 증거가 여기저기서 발견되는데 이 대목에서도 그 증거가 남아있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함락시키자 왜의 덴지 천황은 김유신에게 배를 한 척 선물하였고 사흘 뒤에도 문무왕에게 수어조선 한 척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나당전쟁

 백제와 신라가 모두 멸망하자 당나라는 문무왕에게 계림주대도독이라는 관직을 내리며 신라를 당의 일부로 취급하려는 욕심을 보였다. 신라와 애초에 약속한 경계를 넘어 신라쪽으로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했고 이에 맞서는 신라군은 북으로 진군하기 시작한다. 우리나라의 중. 고등학교 역사책에서는 신라군이 당나라군을 격파하여 당나라군이 물러간 걸로 되어 있지만 사실 신라는 당나라군에 고전하였으며 김유신의 조언에 따라 각지에 방어선을 구축하며 방어 위주의 전략을 펼쳤고 포로로 잡은 당의 장군과 병사들을 당으로 돌려보냈으며, 이때 당나라군과 함께 사죄문과 수많은 물품을 함께 보내며 당나라와 화친한다. 역사책에 나와있는 사실과는 대조적인 모습.

 고령으로 쇠약해진 몸이었지만 이후에도 왕에게 다양한 조언을 하며 신라 정치의 핵심으로 활약하였고 죽기 전 문무왕에게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도 드물지만, 끝까지 잘 해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라는 시경의 말을 인용하여 왕에게 마지막 조언을 하고 7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문무왕의 김유신의 죽음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부조로 비단 1천 필과 조2천석을 보냈으며 나라의 고취수 100명을 장례식에 보내주고, 수묘인을 두어 무덤을 지키게 하였다.